[시리즈Why]현대의료기기, 한의원에선 쓰면 안된다?

30대 직장인 안 모씨는 길에서 자전거를 피하다 넘어져 손목을 다쳤다. 정형외과를 찾아 X-ray 검사를 받은 안 씨는 인대 손상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한의원을 찾아 꾸준히 침 치료를 받고 있다. 안 씨는 “한방 치료도 좋지만 검사를 받을 땐 우선 정형외과를 찾는 편”이라고 말했다.

안 씨처럼 한방병의원에서 염좌 치료를 받고자 할 때 치료 전 양방병원에서 엑스레이(X-ray) 등 현대의료기기를 이용해 검사를 받는 경우는 주변에선 흔한 일이다. 환자 입장에서는 분명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과학의 발전으로 의료기기가 치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면서 이의 사용여부를 놓고 의학계와 한의학계가 수년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양측은 자신들의 입장이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라고 강변하지만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밥그릇 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의학계 “면허 외 의료행위 불법”

서양의학이 과학의 발전과 함께 각종 신약, 현대의료기기를 가지고 치료해 온 만큼 의료기기 사용과 관련한 ‘우선권’이 있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현행 의료법은 의료인만 의료행위는 할 수 있으며, 의료인은 면허 이외의 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정해 놨다. 우리나라는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둘로 구분한 의료 이원화 체제다. 이에 따르면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 한의사는 한방의료와 한방보건지도만 가능하도록 돼 있다.

사법부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2008년 10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을 보자. 당시법원은 한의사가 진단용 엑스선 발생기인 ‘BGM-6’를 사용해 성장판검사를 실시한 것에 대해 “‘한방의료행위’에 포함된다고 보기 어려워 한의사의 면허 범위 외의 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의료법을 근거로 한의계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요구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의협은 지난 2015년 성명에서 “한의사는 한방 원리로 개발된 한방의료기기나 한약, 한약제제, 그리고 한방 고유의 침∙부항 등 한방 시술을 할 수 있으나 현대의학적인 원리로 개발된 현대의료기기나 의약품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의협은 또한 현대의학을 배우지 않은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국민건강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으며 의료인의 진료 영역을 무분별하게 확대할 경우 국민 보건상 심각한 위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의계 “의료기기, 환자 편의성 높여”

반면 한의계는 수년째 현대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필요성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의료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현대의료기기 이용이 보편화되는 상황에서 환자들의 편의성을 높이고 한의학을 더 과학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는 입장이다.

대한한의학협회 관계자는 “한의원 방문 환자 중 가장 많은 증상이 근골격계 환자”라며 “연간 400만건 이상이 이 질환으로 방문하는데 현재의 진료 환경에서는 골절 유무 등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정형외과에서 X-ray를 찍어야 한다고 하면 환자와 의사 모두 불편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대의료기기를 쓸 수 있다, 없다는 논란이 아닌 어떻게 하면 안전성을 높여 기기를 사용할 수 있을지를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의계는 60%이상(의협 조사 기준)의 교육 과정이 양방과 일치하기 때문에 충분히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으며 관련 지식이 부족하다면 추가적인 교육 과정을 만들거나 국가 시험, 인증 등을 통해 안전성과 전문성을 갖추겠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의료기기 사용을 둘러싼 양측의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 10월 정부 부처는 눈여겨 볼만한 결정을 내렸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의협, 전국의사총연합, 대한의원협회 등 3개 의사단체에 대해 의료기기업체와 진단 검사 기관에 한의사와 거래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시정명령과 과징금을 부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 의사단체들이 의료기기업계에서 영향력을 불공정하게 행사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복지부는 현행 의료법상 한의사의 초음파 기기 구입은 불법이 아니며 학술임상연구를 목적으로 일반 한의원에서 사용가능하다고 유권 해석했다. 또한 한의사는 직접 혈액 검사 및 혈액 검사 위탁을 해 진료에 사용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동안 열세에 있었던 한의학계로선 반색할 수 밖에 없는 결정이었다.

이에 대해 의협 등은 한의사의 초음파 기기 사용이 명백한 불법이며, 공정위가 왜곡된 사실을 바탕으로 판단했다며 소송에 나선 상황이다.

한의학계에 다소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 했던 상황은 최근 들어 터진 몇몇 사건으로 인해 다시 꼬이고 있다. 올해 초 일부 한의사가 전문의약품인 리도카인을 사용했다가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사고가 발생했다. 여기에 최근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안아키 카페 사건까지 터지며 한의학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커진 점도 변수가 되고 있다.

◇조금씩 무너지는 의료체계 경계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필요성에 대한 요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보건의료체계의 경계도 조금씩 허물어지는 추세다. 지난해 서울고등법원은 한의사가 뇌파를 측정하는 의료기기인 뇌파계를 사용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며, 그보다 앞선 2014년 헌법재판소는 한의사에게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세극등현미경, 자동시야측정장비, 청력검사기 등 5가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다른 분야이기는 하지만 치과의사가 보톡스에 이어 피부 주름과 잡티를 제거할 수 있는 프락셀레이저 시술을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그렇다고 사법부가 일방적으로 한의학계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와 사법부는 IPL, CT, X-RAY, 초음파기기, 카복시 기기 등 대다수 현대의료기기에 대해 면허 범위 외 해당하므로 한의사가 사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놓은 바 있다.

양쪽의 다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도 지금까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어느 한쪽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지속되는 의료 현장의 갈등이 보건의료 발전을 위축시키고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선 양측이 대승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제는 한방의 의료기기 사용 규제 빗장을 열어야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의료기기 빗장 규제 철폐, ‘고민’해야 할 시점

아직 서양의학으로도 원인과 치료법을 찾지 못한 질병은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환자는 양한방 중 자신의 질병에 대한 치료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한의사가 환자의 선택을 받았다면 과학적인 진단을 토대로 한방 치료를 하기 위해 의료기기를 사용이 효과적일 것이다.

물론 그에 맞는 교육과 기술을 통한 전문성과 안전성을 갖춘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이는 한방과 양방 모두에 긍정적인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세계 동양의학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중국은 형식상 중의(한국의 한의학 해당)와 서의(한국의 양의 해당)를 구분하고 있으나 내용은 통합돼 있다. 중-서의 구분 없이 상호 진단 및 처방이 가능하고 의료기기 제한도 없다. 국내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순 없지만 중의사가 제한 없이 의료기기를 사용해 환자의 사망률이 증가했다는 보고는 찾기 어렵다.

지난해 11월 열린 ‘한·중 진단체계 세미나’ 에서 가해충 북경중의약대학교 교수 등은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한양방 협진, 중서의 결합 등을 정부차원에서 적극 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은 중의약 산업으로 매년 4조 원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지난 2010년 양한방협진제도를 도입하긴 했지만 그 이후 제대로 진척된 내용이 없다. 복지부가 지난해 7월부터 의료기관 13곳에 양한방협진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게 전부다.

국회 입법조사처 역시 지난 14일 현재 교육체계와 면허체계를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 두 직무간 발전적인 모습을 도출할 수 있는 기반으로 ‘협진 체계’의 확대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먼저 양쪽의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 구성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는 게 입법조사처의 입장이다. 의료기기 사용을 둘러싸고 복지부, 의협, 한의협이 참여한 협의체가 이미 만들어졌지만 지난 2015년 12월 잠정 중단된 이후 길을 잃은 채 헤매고 있는 점도 아쉽기만 하다.

임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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