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Why]정수기 물이라고 무조건 믿지 마라

인체의 70%를 차지하는 물. 사람은 3주를 굶어도 버틸 수 있지만 물은 사흘만 마시지 않아도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건강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죠. 최근 전국적으로 극심한 가뭄은 이런 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우리가 가장 흔히 물을 접하는 경로는 물을 마실 때입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수돗물을 끓여 마시거나 약수를 떠다마시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1991년 경북 구미시 소재 두산전자의 페놀원액 저장 탱크에서 페놀수지 생산라인으로 통하는 파이프가 파열되면서 무려 30톤의 페놀이 대구시 상수원으로 흘러 들어가 수돗물을 오염시켰습니다. 이 페놀은 낙동강을 타고 흘러 경남 밀양과 함안 등의 수원지마저 더럽혔습니다. 결과적으로 영남 전역이 페놀 파동에 몸살을 앓았죠. 이듬해 일어난 2차 사고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됐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수돗물에 대한 불신을 넘어 거부로 이어졌고 정수기 사용과 생수(먹는샘물) 소비를 급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정수기는 이제 웬만한 가정과 식당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익숙한 생활 필수가전이 됐죠. 그만큼 정수기 물에 대한 믿음도 큽니다. 그러나 막상 정수기를 통해 걸러낸 물이 다 좋은 걸까요?

◇정수기 시장 3조 육박…70%는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는 애초 상수도가 공급되지 않는 지역에서 사용하는 물을 정화할 목적으로 개발됐습니다. 1970년대 도입 당시만 해도 일부 부유층에서만 사용했지만 1990년대 초부터 일반 가정에 급격히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으로 물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데다 생활수준이 나아진 것도 한몫했습니다.

환경부가 지난해 내놓은 ‘2016 환경백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600만대 이상의 정수기가 보급돼 있고 연간 판매 대수(렌탈 포함)는 200만대를 웃돕니다. 업계에선 전체 정수기 시장 규모를 2조5000억~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200여개의 정수기 제조·수입판매업체가 영업 중인 가운데 점유율이 약 40%에 달하는 코웨이가 1위를 독주하고 있습니다. 그 뒤를 청호나이스와 SK매직, 쿠쿠전자, LG전자 등 후발 업체가 따르고 있죠. 정수기가 물을 걸러내는 방식은 크게 역삼투압, 중공사막, 전기분해 방식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코웨이, 청호나이스 등 선두업체들을 중심으로 역삼투압 방식의 정수기가 전체 시장의 60~7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화능력 甲’ 역삼투압 정수기…걸러내도 너무 걸러낸다

역삼투압 방식이란 불순물이 많은 쪽의 물에 삼투압보다 높은 압력을 가한 뒤 핵심 필터(RO 멤브레인 필터)에 통과시켜 불순물이 적은 쪽으로 이동시키는 정수 방식입니다.

주의 깊게 볼 것은 필터 구멍 크기입니다. RO 멤브레인 필터의 구멍은 바늘구멍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촘촘하고 좁습니다. 사람 머리카락 100만분의 1 크기인 0.0001마이크로미터(㎛)에 불과하다면 이해가 좀 빠르실까요. 이 미세한 구멍으로 물을 걸러내 각종 중금속과 바이러스, 미생물 등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다른 어떤 정수 방식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죠. 하지만 너무 깨끗한 게 되레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요.

전문가들은 ‘좋은 물’의 조건으로 중금속, 오염물질 등의 유해 성분이 없으면서 칼슘과 칼륨, 마그네슘, 나트륨 등의 미네랄이 적당량 함유된 물을 꼽습니다. 역삼투압 방식의 정수기는 각종 박테리아와 화학물질을 비롯한 유해 성분을 거르는 것은 물론 몸에 유익한 미네랄 성분 역시 완전히 제거해버립니다.

△미네랄 없고 산성화된 물, 건강 위협할 수도

미네랄은 우리 몸에서 차지하는 양이 3% 남짓 하지만 그 역할은 매우 큽니다. 뼈와 손톱, 피부, 머리카락 등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은 물론 생리 기능 조절과 유지, 성장 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조금만 부족해도 신진대사에 문제가 생기면서 건강을 위협할 수 있죠.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미네랄 부족 시 면역력 저하와 만성피로, 노화 등이 뒤따릅니다.

현대인들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공식품 위주의 식습관에 길들어 영양 편식이 심합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만성적인 미네랄 결핍에 시달리는 이유입니다. 물 속에 든 천연 미네랄은 인체 보호 기능과 더불어 채소나 과일 등의 식품에 포함된 미네랄보다 흡수 속도가 빨라 매일 섭취해야 하는 총 미네랄의 10~3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다양한 역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마시는 물은 최소 수준의 필수 미네랄을 포함해야 한다”고 밝힌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또 미네랄과 알칼리성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입니다. 풍부한 미네랄이 알칼리성 물을 만들기 때문이죠. 그러나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의 경우 역삼투압 물에 녹아 있는 탄산가스가 필터를 통과해 정수된 물의 수소이온지수(pH)를 낮춰 pH 6.0 이하의 산성수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 몸의 혈액은 약알칼리성을 띱니다. 산성수를 많이 마시면 혈액은 정상적인 알칼리성을 유지하기 위해 폐와 신장, 세포활동 등에 과부하를 겁니다. 이 과정에서 탈수가 일어나고 혈액 건강은 더 나빠지게 됩니다. 혈액의 산성화는 혈액을 통한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암과 심근경색, 뇌경색, 신장질환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다수 나와 있습니다.

△산성수 식수 허용 韓 유일…업체, 음식물로 미네랄 섭취 가능 반박

우리나라의 수돗물 pH는 7.4 전후의 약알칼리성이지만 현재 유통 중인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를 통해 걸러지면 pH 5.8 이하로 떨어집니다. 우리나라의 먹는 물 수질 기준은 사실상 산성수를 허용하고 있는 셈이죠. 이는 WHO(pH 6.5~8.5)를 비롯해 미국과 캐나다, 호주, 독일, 프랑스 등이 pH 6.5 이상의 물을 식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과 비교됩니다.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를 주력으로 내세우는 업체들은 물을 통해 흡수되는 미네랄의 양이 워낙 미미한 만큼 음식물을 통해 섭취해도 충분하다고 반박합니다. 예를 들어 멸치 두 마리면 충분히 섭취 가능한 미네랄을 물을 통해 흡수하려면 0.4톤은 마셔야 한다는 논리죠.

하지만 이는 단순히 미네랄 섭취에만 초점을 맞춘 것일 뿐 산성수 음용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쇠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등 육류를 비롯해 라면, 국수, 빵, 과자 등 거의 매일 산성식품을 먹고 있는데 물마저 산성수를 마실 경우 인체의 산성화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정수기업체들은 우리 몸의 완충 능력이 산성화를 막아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산성식품 섭취와 산성수 음용을 버텨내려면 몸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겠죠.

환경부와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와 산하기관은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에 대한 심층 조사는 고사하고 이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당국이 국민의 먹는 물 기준 논란에 뒷짐지고 있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 당국과 정수기업체 간의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나노필터’ 대안될 수도…지역별 사용 차별화도 방법

이런 가운데 최근 정수기시장에선 변화의 조짐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공사막 또는 기존 중공사막 필터를 개선한 나노(NF) 멤브레인 필터를 채용한 직수형 정수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는 것이죠. 지난해 코웨이의 역삼투압 방식 얼음정수기에서 중금속이 검출되면서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의 신뢰도에 금이 간 탓도 큽니다.

정수방식상 물탱크가 필요한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와 달리 직수형은 물이 흐르면서 바로 필터를 통과해 고이는 물이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세균 번식 우려가 적죠. 구조가 단순한 만큼 가격도 저렴합니다.

직수형 정수기에 든 NF 필터는 구멍 크기가 0.0008~0.002㎛로 일반적인 중공사막(UF) 필터(0.001~0.02㎛)보다는 촘촘하지만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에 쓰이는 RO 필터에 비해 넓습니다. 역삼투압 방식보다 정화능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상대적으로 물속 미네랄은 보존할 수 있죠. 정수기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지만 미네랄을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의 대안으로는 분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를 전적으로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최고 수준의 정화능력이 요구되는 상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 처한 환경에 맞는 정수방식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실제 전문가들도 이를 추천합니다.

‘물 박사’로 불리는 이태관 계명대 환경과학과 교수는 저서 ‘물 전문가는 어떤 물을 마실까’를 통해 “본가가 있는 서울은 공업단지 같은 대규모 공장입지가 없어 중공사막 방식을 적용한 정수기를 사용하는 반면 재직 중인 대학이 있는 대구에선 주변 공업단지 등을 고려해 역삼투압 방식 정수기를 쓴다”며 “현재로선 이 방법이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김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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